로마가 남긴 것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린 로마는 이제 전성기를 지났을 뿐, 그 뒤로도 수명은 아직 한참 더 남았습니다. 서로마를 기준으로 해도 300년에 가까운 역사가 남았구요. 비잔티움 제국으로도 불리우는 동로마의 역사까지 포함한다면 1200년이 넘는 시간을 더 존속했으니 이제 시작인 셈이죠. 그래서 로마가 남긴 것을 여기에서 얘기하는게 너무 이른 감이 좀 있긴 하지만, 로마가 후세에 남긴 유산들 중 이미 이때부터 존재했던 것들에 대해서 한 번 돌아볼까 합니다.
로마의 경제는 공화정 초기부터 정복사업에서 얻어진 포로들을 노예로 이용해 노동력을 충당해왔습니다. 하지만, 제정 시대에 들어서는 정복사업이 예전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주기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키면서 노예의 수가 감소했습니다.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생산 자체가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않았구요. 그러자 로마의 경제를 지탱하다시피 했던 대농장 라티푼디움도 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죠.
노예 노동력이 감소한 자리는 소작농들에 의해서 채워졌습니다. 그전에도 이미 자영농에서 몰락한 소작농들은 존재했지만 이제 라티푼디움은 보다 본격적인 소작제, 콜로나투스로 전환됩니다. 원래 소작농은 자신의 토지가 없기 때문에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지대를 납부할 뿐, 자유롭게 가족을 꾸리고 사유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자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콜로나투스가 본격화면서 농장에 묶여 조금씩 거주 이전의 자유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서로마 멸망 이후 등장하는 중세 장원제의 매우 초기 모습이 이 때부터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죠.
로마가 중세에 전해준 또 하나의 유산으로는 에퀴테스라는 계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에퀴테스는 원래 '말을 탄 군인'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요. 말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재산을 축적한 계층이라는 의미겠죠? 이들은 이미 공화정 당시 정복 활동으로 거대해진 로마에 가장 필요한 행정, 관리 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지배 계층의 가장 말단으로서 로마 사회의 중추가 된 이들은 중세가 되면, 사회의 가장 주도적인 신분인 기사 계층을 차지하게 됩니다.
한편, 정치적 평화와 경제적 번영으로 로마는 여러 속주들을 이어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되었는데요. 로마가 정복활동을 하던 시기부터 설치해왔던 도로망 역시 로마 제국의 영토만큼이나 방대해졌습니다. 이 도로망은 원래 정복활동을 위한 군대와 군수물자를 이동시키는 용도였지만, 로마 전역에 황제의 행정력이 미치도록 통신을 용이하게 하는 데에도 매우 큰 역할을 했죠. 황제가 나라 구석구석에 자신의 명령을 전달하려면 그 명령을 빠르게 전할 수단이 필요할텐데, 로마의 도로망은 그걸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환경을 만족시켜준 것이죠.
도로망의 역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다양한 민족과 문화들을 거느린 나라였던 만큼 로마의 도로는 이들 모두를 이어주는 거대하고 촘촘한 연결망이었죠. 고대 오리엔트 문명과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도시들, 그리고 더 동쪽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도로들은 무역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라비아 대상무역도 이 때 발생했죠. 실크로드를 오가는 아라비아의 대상들을 통해 로마에서는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향료가 거래되기도 하고, 중국 사서인 후한서에는 대진왕 (로마 황제) 안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름이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2세기 무렵부터 이미 유라시아 양 끝의 두 제국은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네요.
도로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는 길목에는 도시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현재 서유럽의 주요 도시들 중 상당수가 형성된 것도 이 때 쯤인 것으로 보입니다. 동방의 도시들이야 워낙 로마라는 나라가 처음 생겨나기도 전부터 이미 번성해 있었지만 서유럽 지역은 그 전까지 그런 대도시가 전무했었는데요. 제정 로마 시기부터는 이 지역에도 상당한 규모의 도시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파리, 랭스, 아비뇽, 보르도, 스트라스부르, 스위스의 제네바, 오스트리아의 빈, 영국의 런던, 콜체스터, 링컨, 요크, 세인트올번스, 스페인의 사라고사, 톨레도, 코르도바, 독일의 쾰른 등이 바로 그런 도시들입니다.
이제 로마는 유럽의 언어, 사회체계, 산업, 관습, 문화, 도시 등 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모든 요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며 그리스와 함께 그레코로만 문화의 두번째 기반이 되었습니다. 로마어인 라틴어가 제국 전체의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통화 체계나 법률, 무역 관습 등도 로마식이 통용되었습니다. 마치 헬레니즘 시기를 전후로 그리스식이 헬레니즘 문화권 전 지역에서 통용되었던 것처럼요.
다만 종교에 있어서는 로마의 다신교가 속주민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반도 안의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다신교를 신봉했지만 그들이 새로 정복한 속주에서는 이미 속주민들 나름대로의 토착 종교가 자리잡고 있었죠. 로마는 이를 속주의 전통으로 인정하는 관용 정책을 폈습니다. 때로는 정복활동에 동원된 병사들을 통해 외국의 토착 종교가 오히려 로마 본토로 흘러들어오기도 했죠. 그러나 인신을 제물로 바치는 등 일부 야만적 관습이 남아있는 드루이드교나 배타적인 성격의 유일신교인 유대교, 크리스트교는 탄압받기도 했습니다.
로마가 유일신교인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를 배척했다는 사실은 좀 새삼스럽기도 합니다. 오늘날 흔히 카톨릭을 로마 카톨릭으로 부를 만큼 우리의 머릿속에서 로마와 크리스트교는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로마는 전통적 다신교 사상에 더해 황제를 신격화해 섬기는 종교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들의 유일신만을 섬기기를 고집하는 유대교인들과 크리스트교인들은 당연히 박해의 대상이 되었죠. 그러나 이것도 잠시... 계속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의 교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로마 정계에서는 이들을 박해하는 대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다섯 황제의 해
오현제 시대는 끝났지만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 중 유일하게 친아들이 생존해 있었는데요. 그래서 선대 4명의 황제들이 양자를 들여 제위를 잇게 한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친자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 있었죠. 앞서서도 많은 황제들이 있었지만 친자가 제위를 있는 평범한 사례가 오히려 매우 예외적이었던 터라, 콤모두스는 운이 좋은 경우였습니다. 혈통적 정통성을 갖춘 황제의 친자로서 다음 제위를 이을 후계자가 되어 착실한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180년에 즉위한 콤모두스의 통치 초반은 무탈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모난 데 없는 원만한 성격으로 큰 문제 없이 성실히 정사에 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친누나였던 루킬라가 그를 암살하려했던 난데없는 사건으로 별안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암살 시도는 다행히 미수로 끝났지만 콤모두스는 주변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되었죠. 거기에 극도의 대인기피증과 편집증이 더해져 이제 더 이상은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오현제 시대의 평화를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로 사회불안을 초래했고, 192년 근위대에 의해 암살되며 불과 31세의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제정 초기, 네로의 사후 로마 정국이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한 해에 무려 네 명의 황제가 즉위했던 사건이 있었죠? 콤모두스라는 폭군이 사라진 후의 상황도 이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암살의 주범들은 한때 집정관과 아프리카 총독을 역임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명장으로도 유명했던 페르티낙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하지만 페르티낙스는 자신을 옹립한 세력인 근위대를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삼으며 공격하려 하는 바람에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죠. 결국 근위대는 자신들이 옹립한 페르티낙스를 3개월 만에 제거하는 만행을 벌입니다.
황제 개인을 위한 사병들이었던 근위대는 이제 로마 정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페르티낙스의 사후, 근위대는 자신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인물을 새 황제로 옹립할 것을 노골적으로 천명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죠. 개인의 능력, 혈통적 배경, 시민들의 지지, 원로원의 승인 같은 것들은 이제 부차적인 문제이고, 단지 근위대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 황제가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니까요. 이제 황제 자리는 근위대에게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근위대가 만족할만한 가격으로 제위를 산 인물은 페르티낙스의 동료이자 역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충직하고 용맹한 사령관이었던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올곧은 성품과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시민들의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었지만 황제 자리를 돈으로 사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급격히 신망을 잃고 평판이 추락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걸까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근위대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은 로마의 각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로마 시내 안에서는 근위대를 제외하면 군대를 동원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각 속주에 파견되어 있는 총독들은 그렇지 않았죠. 그들은 단지 근위대의 추대를 받았을 뿐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각자 자신의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중국사 어딘가에서도 많이 본듯한 장면이네요.
로마에서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근위대 그리고 원로원이 모두 속주 각지에서 벌어지는 이 상황들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를 칭한 세명의 총독 중 가장 능수능란하게 사태를 장악해 나간 것은 판노니아 총독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죠. 그는 우선 재빠르게 주변에 주둔 중인 로마군들을 포섭하고 브리타니아 총독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는 화친을 청해 공동 황제로 함께 즉위할 것을 조건으로 그를 브리타니아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진격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있는 로마시를 포위했습니다.
한편,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이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승기를 잡았음을 확인하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폐위 결의안을 가결시켰습니다. 그러자 돈을 받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던 근위대도 그에게서 돌아섰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곧 처형되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주인이 없어진 로마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로마로 입성한 셉티미우스 베세루스는 근위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대로 황제를 시해하고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 그들을 대거 숙청하고 물갈이를 했습니다. 세 사람 중 누가 로마를 접수했다 하더라도 당연한 수순이었겠죠.
로마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내전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특히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동방 속주의 총독들을 모두 포섭하며 점점 세력이 강력해지고 있었죠. 그는 틈틈이 곡창지대인 이집트로의 진출을 모색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부유한 동방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세력을 진압하길 원했습니다. 둘은 비잔티움과 마르마라 해안의 키지쿠스, 아나톨리아 북서쪽의 니케아, 남쪽의 이소스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모두 역사에서 다른 굵직한 전투로 이름을 남긴 곳들이네요.
여러 번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결과는 대체적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우세였습니다. 이소스 전투에서 패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그 인근의 안티오키아에서 붙잡혀 처형당하고 그를 지지했던 세력들은 모두 파르티아로 망명했습니다. 그들을 모두 일소하길 원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들의 망명을 받아준 파르티아로 원정까지 감행했지만 사실 파르티아는 예전에도 그랬듯 로마가 그렇게 마음대로 시비를 걸만한 상대는 아니었죠. 원정은 큰 전투없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습니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의 장자인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를 후계자로 세우며 세베루스 왕조가 탄생했음을 천명했습니다. 이 후계자는 훗날 카라칼라로 더 잘 알려진 폭군이 됩니다. 이제 한 명의 경쟁자만이 남았네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부터 공동 황제 제안을 받고 브리타니아로 물러나 있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분노했습니다. 그걸 이제 알았나 싶지만... 어쨌든 분노의 진격을 시작한 그는 순식간에 갈리아 일부와 히스파니아를 접수했습니다.
파죽지세로 세력을 불린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 맞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엄청난 금액의 돈을 뿌려 인근에 주둔 중인 로마군들을 자신의 편으로 단속했습니다. 그리고 양 진영은 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 해당하는 루그두눔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맞붙었죠. 어느 한 쪽의 우세를 점치기 함든 팽팽한 접전 끝에 마침내 전투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승리로 기울었고, 전투에서 패하고 도주하던 클루디우스 알비누스가 자결하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마침내 다섯 황제들 간의 싸움에서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다.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그 다음해인 서기 193년, 한 해 동안의 일이었습니다.
세베루스 왕조
최초의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는 이제 내전으로 엉망이 된 정국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상당히 과격하더라구요. 그는 일단 근위대를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인물들로 채우며 물갈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만큼 원로원과 관료 계층에 남아있던 예전의 제위 경쟁자들과 이전 왕조의 왕족들,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들 역시 모두 정리했죠. 그로서는 피 튀기는 내전을 겪었으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을지 모르겠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북아프리카 출신인 그에게는 '포에니의 술라'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해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철인 황제였다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스스로 군인 황제를 자처했습니다. 그가 판노니아 속주의 총독이었을 때부터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물리치며 제위를 손에 넣기까지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유능한 군사령관으로서의 모습이었죠. 그런 그가 황제로 즉위했으니, 군대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군인의 급여를 인상하고 복지 등의 처우를 개선하며 군대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에 매우 신경썼습니다. 황제의 최측근인 근위대장은 어떨까요? 근위대장은 이제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넘어서서 행정을 감독하거나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군을 중심으로 정국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이제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가 주목한 곳은 역대 로마의 통치자들이 그렇게 여러 번 정복에 도전했지만 딱히 신통한 결과를 거두지 못했던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였습니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의 잔당들을 처단하기 위해 감행했던 첫번째 원정은 좀 갑작스러운 감이 있어서 흐지부지 되었지만 경쟁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된 지금은 좀 더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들어가 과거 트라야누스 황제가 시도했던 것처럼 그곳의 오래된 도시들을 거쳐, 197년에 마침내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파르티아의 국력도 이제 예전만 못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르티아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데에는 실패하고 팔레스타인, 시리아 지역과 이집트를 순방한 뒤 로마로 돌아옵니다. 나쁘지 않은 성과였습니다.
한편, 브리타니아에서는 칼레도니아 인들이 로마의 브리타니아 속주로 침범해 들어와 군대를 급습하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파르티아 원정이 끝난지 6년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이제 젊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그는 다시 원정길에 올랐죠. 거긴 날씨도 안좋잖아요. 그는 마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랬듯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병사들을 격려해가며 전투를 지휘했고 칼레도니아 인들을 북쪽으로 쫒아버리며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며 현재의 영국 요크 지방에 해당하는 에보라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211년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그의 목적은 브리타니아 전체를 정복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중도에 병사하자 원정은 중단되고 브리타니아 정복 역시 미완으로 끝났습니다. 로마군은 다시 하드리아누스 방벽 이남으로 후퇴하구요. 이 때를 마지막으로 로마군은 다시는 하드리아누스 방벽 위로 진출하지 못했죠. 그렇게 황제와 함께 원정에 나섰던 그의 두 아들이 공동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흔히 카라칼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가 그 두 사람이었습니다.
오현제 시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두 아들 기억하시나요? 각각 다른 가문에서 입양된 양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였죠. 두 사람은 친형제는 아니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의 험난했던 재위기간 동안 그런 훌륭한 통치를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함께 공동 황제로 즉위했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의 도움이 컸을 거에요. 그런데 이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서거하고 함께 부제로 있었던 그의 두 친아들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연년생의 친형제인 두 사람은 이미 후계자 수업을 받던 부제 시절부터 사이가 험악했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죽기 직전 두 아들에게 사이좋게 지내고, 군인을 우대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요. 형제는 이 두가지 유언 중 하나만 지키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공동 황제로 즉위한 후 권력 다툼을 벌이던 두 형제는 결국 카라칼라가 게타를 직접 죽이면서 파국을 맞이했죠. 두 사람 중 세간의 평가가 좀 더 긍정적이었던 건 동생인 게타 쪽이었다고 해요. 카라칼라는 어린 시절부터 난폭했던 반면 게타는 좀 더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인기 역시 게타 쪽으로 기울었는데요. 두 사람이 즉위한 뒤로는 이런 상황이 카라칼라에게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게타를 지지했던 사람들을 모두 색출해내서 그들에게 다양한 혐의를 씌워 결국은 잔인하게 처형했는데요. 원로원 의원에서부터 궁중의 시종들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분별하고 무자비한 숙청이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에게 고언을 하거나 비판을 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그는 광범위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 중에는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는 인사들도 있었기 때문에, 카라칼라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과 증오심은 점차 커져가고 있었죠.
하지만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다른 유언 하나는 잘 지켰습니다. 군인들의 급여를 또 한번 크게 인상한 것입니다. 근데 이건 큰 돈이 드는 일이죠. 카라칼라는 곧 부족해진 국고를 다시 채우기 위해 부유층에는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노예를 해방해 과세 대상을 늘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들로도 한계에 부딛히자 이번에는 은 함량을 낮춘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 군인들의 급여를 충당했죠. 그 덕분일까요? 군대는 그에게 충성스러웠습니다. 나름 군사적 재능이 있었던 그는 군대를 이끌고 게르마니아 지역으로 순행을 떠났다가 그곳의 게르만족 일부를 몰아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카라칼라의 업적 중 좀 묘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 즉 로마 시민과 속주민에게 동일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반포한 것인데요. 딱히 카라칼라가 속주민의 인권이나 자유민들 간의 평등에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에요... 어쨌든 이 칙령을 통해서 이제 로마 제국 내에서는 로미 시민과 속주민 간의 법적 차별이 사라지고, 속주는 로마 본국과 더욱 강한 유대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칙령은 무려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나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인권선언과 함께 나란히 인권과 시민권에 관한 세계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흠...
다수의 역사학자는 카라칼라의 이 칙령이 결국은 과세 대상을 확대해서 세수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반포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요. 카라칼라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로마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역사에 폭군으로만 이름이 남을 뻔한 그가, 적어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정도로 상향평가가 된 것은 이 칙령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이 칙령 때문에 안내던 세금을 더 내게 되었을 속주민들에게는 이 칙령이 좋게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게르마니아 순행에서 나름 만족할만한 성과를 올렸다고 생각한 카라칼라는 이번에는 동방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다키아와 마케도니아, 트라키아와 그리스를 거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순행한 그는 가는 곳마다 횡포를 부리고 도시의 유력자들을 수탈하면서 속주민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냥 횡포를 부리는 수준을 넘어 폭력을 휘두르다 시민들이 이에 저항하자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죠. 때문에 이미 카라칼라를 향한 시민들의 증오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카라칼라가 동방을 순행한 것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원정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죠. 도를 넘은 그의 변덕과 기행에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군대 내부의 일부 세력에 의해 그는 원정길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파격적인 급여 인상과 지속적인 처우 개선으로 일반 군인들에게는 상당히 인기를 끌었지만, 폭언이나 강압적인 명령 등의 행태로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이미 민심을 잃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카라칼라의 통치는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이제 제위는 누구에게로 갈까요? 카라칼라는 아들도 없었고 지목해둔 후계자도 없었는데요. 그래서 세베루스 왕조의 시작 이래로 황제 다음 가는 권세를 누려온 근위대가 직접 황제로 즉위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제위는 근위대장인 마크리누스가 차지합니다. 최초의 흑인 황제라는 설도 있는데 그보다는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 인이라는 게 더 정설인가 봅니다. 그는 카라칼라의 암살에 연루되었던 인물로, 군부 고위층에서 카라칼라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시기부터 이미 제위 후보자로 물밑 거론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카라칼라의 암살 후 적법한 제위 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암살에 연루되었던 세력을 중심으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라칼라가 진행 중이던 파르티아 원정을 중단하고 불리한 조건으로 파르티아와 강화 협정을 맺으며 다시 군대의 불만을 샀죠.
파르티아 원정이 중단된 것은 마크리누스에게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카라칼라가 사람들에게 증오에 가까운 지탄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병사들에게 군 사령관으로서의 유능한 면모와 화끈하고? 마초적인 모습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런 그가 진행하던 대대적인 원정을 중단하고 적국에게 비굴한 모습으로 강화를 요청하다니... 마크리누스는 황제로서 비겁한 행동을 보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마크리누스의 인기가 떨어진 사이, 몰락했던 카라칼라의 외가에서는 카라칼라의 사생아가 나타났다며 그를 적법한 황제로 세우려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까지도 카라칼라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카라칼라의 사생아에게로 집중되었죠. 사실 그는 카라칼라의 사생아는 아니고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의 외손자로 따지고 보면 좀 먼 외가친척입니다. 하지만 순식간의 군대의 지지를 얻은 그는 마크리누스를 몰아내고 즉위하며 세베루스 왕조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새로 즉위한 카라칼라의 가짜 사생아의 이름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인데요. 엘라가발루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15살의 나이에 즉위한 그는 온갖 사치와 향락, 기행으로 일관하다가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에 의해 불과 3년 만에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킹메이커 율리아 마이사는 다시 엘라가발루스의 이종사촌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옹립하는데요. 그가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되죠.
새롭게 즉위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국정을 수습하며 나름 시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14살의 어린 나이였고 자신을 옹립한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그래도 율리아 마이사는 뛰어난 정무감각으로 어린 손자의 통치를 도왔지만 그가 죽고 난 후에 실권을 장악한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열정적으로 일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머니의 간섭으로 군부와 마찰을 빚었고, 이를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군부가 새 황제로 추대한 게르마니아 군단의 장교 출신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군인 황제 시대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재위 기간이 짧고 권력이 불안정해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딱 50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가 즉위했는데요. 황제인지 아닌지 약간 애매한 경우를 제외해도 18명 정도이니 평균적으로 2-3년의 재위기간을 거친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자, 로마는 급속히 쇠락했습니다. 황제들이 군대의 급여를 높여주기 위해 무분별하게 주조한 은화가 시장에 풀리며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서민들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무역은 위축되었습니다. 농토는 황폐화되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자주 창궐하니, 국방력이 약해지면서 이민족들의 침입도 잦아졌죠.
로마 제국 각지의 군대에 의해 황제가 옹립되었다가 폐위되기를 반복한 이 시대는 군인들이 제위를 좌지우지했다고 해서 '군인 황제 시대'라는 명칭이 붙기도 했는데요. 처음 들었을 때는 황제가 다 군인 출신이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이 당시 로마가 대내외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했던 것을 표현하는 '3세기의 위기'라는 이름이 더 나은 거 같습니다. 둘 다 실제로 존재하는 용어이기는 합니다.
무엇이 위기를 가져온 것일까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세베루스 왕조의 창건과 함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해진 군대에 직접적인 원인을 돌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조를 열었고 그 이후에 즉위한 카라칼라 역시 재위 내내 군대로부터의 인기를 늘 의식했죠. 군대의 인기를 얻고자 관료나 원로원등 군대를 견제할만한 다른 세력들을 배제할수록 군대의 영향력은 점차 커져갔습니다. 이런 현실을 바꿔보고자 군대 개혁에 손을 댄 황제들은 여지없이 제거되었죠.
군대 중에서도 황제의 최측근인 근위대는 이제 단순히 군인일 뿐만 아니라 정사를 좌지우지할만한 권력자들이 되었습니다. 로마 시내의 유일한 무장세력으로서 황제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나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니 황제마저도 근위대가 자신을 암살하지 않을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죠.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근위대 출신 군인이 스스로 제위에 오르며 근위대와 근위대장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의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아마 제정 초기로 더 거슬러 올라가야할 거 같습니다. 애초에 로마의 제정은 근위대와 함께 시작한 것이니까요. 동방의 군주제에서의 황제와는 아주 다르게 로마의 황제는 공화국 로마의 최고권력자 정도로 보는 게 더 적당할 거 같아요. 그래서 초대 황제로 일컫어지는 아우구스투스 역시 스스로를 동방의 절대군주와 같은 황제로 공표하지는 않았죠. 이러한 애매한 위치의 로마 황제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은 근위대 고유의 역할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한 제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군부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고 그러다 결국 지금의 모습이 된 것 아닐지...
내부적으로는 그랬구요. 로마 밖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더 골치가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외적의 침입은 넓은 영토를 가진 로마에게 있어 특별한 일이 아니었죠. 나라가 넓으면 국경을 접하는 국가나 세력들도 다양할테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들과 마찰이 빚어지는 일도 많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동안 특별한 일이 없었던 동방에서 새로운 강력한 세력이 부상하며 로마를 위협했습니다. 224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오랫동안 로마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파르티아를 멸망시키며 지금의 이란 지역의 새로운 패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파르티아는 이미 국력이 쇠해가는 와중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절의 원정으로 한번 큰 타격을 입고 무너져가고 있었는데요. 그 때 그 원정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파르티아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결에서 좀 더 오래 버텼더라면 로마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을 마주하는 시점도 좀 더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파르티아는 로마와 워낙 오랫동안 대결을 하다보니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협상도 통하던 상대였지만 혈기왕성한 신생국인 사산조 페르시아는 그렇지 않았을 거 같아요. 로마로서는 더 까다로운 상대 아니었을까요?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게르만족이 날뛰던 로마의 서부와 북부에 비하면 양반이었죠. 이 즈음에 루마니아에서 발흥한 고트족은 257년 소아시아 북부를 점령하면서 로마의 중요한 육로를 봉쇄했습니다. 이미 군사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로마는 변방에서 외적들의 출몰이 잦아지자 결국 변방의 속주가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하는 것을 허용했는데요. 이 정책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두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오히려 로마 제국의 약화를 가져왔습니다. 오늘날의 발칸반도 서부에 해당하는 일리리쿰 속주 출신의 황제들은 속주군을 이용해 고트족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제 전통의 로마 군단은 붕괴되고 속주의 군대를 거느린 장군들은 제각각 군벌화되었죠.
게르만족의 공격은 단지 이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그 시점부터 로마가 늘 안고 있었던 문제였죠. 좀처럼 단일한 국가 수준의 공동체로 발전하지 못했던 이들은 나름 내부에서 부족끼리의 경쟁을 통해 점차 강성해졌습니다. 거기에 로마군과 워낙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전투를 치르다보니 그 사이 상당한 데이터가 쌓여서 로마군을 상대하는 나름의 노하우를 습득하기도 했구요. 이들은 오현제 시대, 로마가 강력했던 시절에는 그다지 기를 펴지 못했지만 다른 많은 내적인, 외적인 문제들로 로마가 약화되자 무서운 기세로 로마의 변경 지역을 위협했습니다.
사상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며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을 내린 이는 284년에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였습니다. 하지만 군인 황제 시대 동안 로마가 쇠락 일변도로만 치닫은 건 아니었구요. 그 시기에 즉위한 모든 황제들이 다 무능하고, 권력에만 눈이 먼 것도 아니었습니다. 15년간 재위하며 제국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한 갈리에누스나 이민족들을 격퇴하고 전제군주화의 바탕을 마련한 아우렐리아누스와 같은 황제들도 있었죠. 이들은 점차 멸망의 길로 치닫으려는 로마를 멱살 캐리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해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 만한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분열된 로마
모처럼 20년이 넘게 장기 집권한 황제가 등장했네요. 그는 즉위 2년 뒤 로마의 영토를 넷으로 분할해 2명의 정제와 부제가 다스리는 테트라키아, 즉 사두정치를 수립했습니다. 행정력의 약화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시행한 궁여지책이었죠. 이 궁여지책은 단기적으로나마 효율적이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거 같은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시행한건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당장 두 명의 황제가 즉위하는 공동 황제 제도만해도 문제가 만만치 않았는데, 황제가 네명이라니, 자칫하면 황제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제국이 사분오열 될 수도 있을텐데 말이에요.
그는 우선 로마 제국을 동서로 분할했습니다.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를 수도로 소아시아와 이집트는 동방 정제인 자신이 다스리고, 부제인 갈레리우스는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발칸반도 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서쪽은 서방 정제인 막시미아누스가 지금의 밀라노인 메디올라눔을 수도로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다스리고, 부제인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의 트리어를 수도로 히스파니아, 갈리아, 브리타니아를 다스리도록 했죠. 테트라키아는 권력을 분할함으로써 각자의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제도였습니다. 덕분에 당장은 권력이 안정되었지만 각각의 정제와 부제가 세력 다툼을 할 수 있는 필연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로마는 여러 속주를 거느리게 된 이래로 속주들 간의 경제력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비단 경제력 뿐만이 아니었죠. 문화적 수준이나 행정력도 각 속주가 모두 제각각이었으니...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동방과 서방의 격차였습니다. 그런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를 크게 동,서로 나누어 버렸으니 이제는 동서 간의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 역시 예전보다는 소극적인 양상을 보였습니다. 동방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본인은 다방면에서 서방보다 문물이 앞서 있는 동방을 차지했으니 서방에는 이제 신경을 덜 쓰겠죠.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정이 성립된 이래로 여러 왕조를 거쳐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정이 가졌던 태생적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를 풀어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황제 권력의 절대화를 추구했습니다. 그 전에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킨 황제들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제정은 동방의 전제군주정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베루스 왕조와 군인 황제 시대의 몇몇 황제들이 시도했던 전제정을 본격적으로 확립해 로마 황제를 동방의 절대군주와 동일한 위치로 끌어올렸죠. 일명, 도미나투스 체제입니다.
로마가 네 등분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로마 제국 전체의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였습니다. 그는 우선 네 명의 황제들 중 동방 정제가 가장 높인 서열임을 공표하고 동방식 전제주의정을 도입했습니다. 또한 의장과 예식도 다 페르시아 풍으로 바꾸고 행정구역도 개편했죠. 당연히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접 통치하는 동방이 로마 전체의 중심이 되었고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화되어 로마 제국의 중심지가 이제는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시가 아닌 동방으로 완전히 이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그는 군사개혁을 통해 속주 총독에게 일임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면서 중앙군을 조직하고 기병대를 육성했습니다. 원래 로마 내에는 군대가 주둔할 수 없었지만 이후에는 각 수도에 중앙군이 상주하다가 변방에 문제가 생기면 기병을 파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군사 개혁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군사력 증강을 위해 기술자들을 징발하고 변방의 군인들은 대를 이어 군인으로 복무시켰죠. 콜로나투스도 강화되어 소작인들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면서 이제 군인들도 농민들도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행한 각 부문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로마 제국의 수명도 훨씬 늘어났습니다.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은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그런 로마 제국을 기사회생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려놓고 보니 그 로마의 모습은 이전의 로마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 된 것 같은...
그런데, 이런 업적을 남긴 디오클레디아누스는 죽을 때까지 절대권력을 누리거나, 또 근위대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305년, 돌연 황제로서의 모든 권한을 내려놓은채 정계 은퇴를 선언합니다. 전례 없는 일이었죠. 당시까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거나, 정적의 위협을 받는 일은 없었다고 하는데요. 학자들이 추정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국정을 운영할 수 없었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그는 고향인 스팔라툼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농사 등 소일거리를 하며 6-7년의 시간을 더 보내다가 세상을 뜬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는 그 당시의 궁전 유적지가 남아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휴양지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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