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삼두정치
카이사르의 사후 빠르게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의 가장 강력한 측근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습니다. 그는 공화파들에 대한 복수로 정국이 또 혼란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속주로 파견하는 한편, 카이사르를 따르던 군인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며 사태를 적절히 수습해 민심을 얻었습니다. 물론 내심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을 차지하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요. 하지만 막상 카이사르의 유서가 공개되고 나니 그 내용이 그의 예상과 너무 달랐습니다.
카이사르가 지명한 후계자는 그의 질녀의 아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였습니다.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었죠. 잘 알려지지 않은, 내세울만한 것도 없는 청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나마 카이사르에게 남은 제일 가까운 남자 혈육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그렇게 빨리 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테니 그를 후계자로 삼아 계속 돌보다가 적당한 시기에 그를 양자로 입적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생각보다 이른 죽음을 맞이하면서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벌어지게 된 것이죠. 그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원래 파르티아로 원정을 떠날 생각이었죠? 그의 죽음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지금의 크로아티아에 해당하는 일리리쿰 지역에서 그 원정을 위한 준비를 거들고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 동안 우정을 나눈 동갑내기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도 그 때 만났습니다. 카이사르의 서거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곧 로마로 돌아와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 유산이란 단지 재산 뿐만이 아니라 그가 가졌던 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지지를 의미하기도 했죠. 그는 어린 나이에도 그 과정을 훌륭히 해내며 카이사르의 지지자들을 안토니우스가 아닌,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한편, 카이사르의 죽음을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위한 기회로 본 원로원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옥타비아누스를 전면에 내세워 잠재적인 다음 독재자 후보 안토니우스를 제거하려고 했죠.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생각보다 훨씬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제거되면 그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죠.
사실 당시 로마에서 가장 큰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이는 따로 있었습니다. 역시 카이사르의 측근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입니다. 그는 당시 갈리아와 하스파니아를 관할하며 무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가진 군대의 2배 규모의 병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레피두스의 중재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동맹을 맺기로 하고 세 사람을 주축으로 하는 두번째 삼두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43년, 카이사르의 죽음으로부터 1년이 흘렀을 때의 일입니다.
삼두정치가 성립되자 세 사람은 자신들의 권력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원로원을 제압하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키케로를 비롯한 공화주의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구요. 암살 이후의 정국의 수습하는 과정에서 안토니우스가 마케도니아로 보냈던 브루투스 일파를 상대로 필리피에서 전투를 벌이고, 패한 브루투스를 자결로 몰아넣었습니다. 사실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꽤 고전하면서 패했던 반면에 안토니우스가 나서서 마침내 승리했다고 하는데요. 그러고 보면 옥타비아누스는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는 별개로 군사적 재능은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나봅니다.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
이제 삼두를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었으니 세 사람 중에서 일인자를 가려야 하겠죠? 로마 전체가 세 사람 손에 들어오자 이 셋은 우선 각자의 영토를 나눠 분할통치를 하기로 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차지했구요.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등 동방의 영토를, 그리고 레피투스는 북아프리카를 차지했죠. 이탈리아 반도는 세 사람의 공동관할구역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 애매한 영토가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나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칠리아 섬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지만 이 과정에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쟁이 마무리되자 레피두스는 당연히 시칠리아에 대해서도 자기 몫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의 휘하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설득해 모두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레피두스를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정계에서 은퇴시켜버립니다. 무슨 말을 헤서 그들을 그렇게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건지 궁금하네요.
한편,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관할구역인 동방 지역을 잘 통치했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비티니아, 아시아 일대 등 옛 헬레니즘 왕국들이 차지했던 지역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되죠. 그리고 로마의 숙원사업이었던 파르티아로 원정을 가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사실 안토니우스는 앞서서 옥타비아누스가 시칠리아를 차지하려고 할 때 도와준 댓가로 자신의 파르티아 원정 지원을 약속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원정에 별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지 않았죠. 약속했던 병력의 10분의 1만 보냈다고 해요.
원정 준비과정에서 군자금이 해결되지 않자 안토니우스는 결국 당시 로마 정계와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서 군자금을 지원받으며 아예 그녀와 결혼해버립니다. 그리고 이집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훗날 원정을 다녀온 뒤에는 자녀를 두고 줄곧 이집트에 눌러 살았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렇게 클레오파트라에게 빌린 돈으로 가까스로 원정군을 꾸려서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지만 또 파르티아를 정복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로마의 편에 서기로 했다가 나중에 은근슬쩍 배신을 때린 아르메니아를 공격해 정복에 성공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원정은 파르티아 원정이 아닌 아르메니아 원정이 되지만요.
그런데 이후 안토니우스는 이상한 행보를 보입니다. 원정 승리에 대한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치르구요.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자녀들에게 로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상속하겠다고 합니다. 로마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혈통에게 넘겨주겠다는 얘기 같잖아요. 거기에 자기가 죽으면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하니, 로마 시민들로서는 우리가 이집트에 병합되나 싶었을지 모릅니다.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죠.
결국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그리스를 통해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하려고 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양측은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에서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로마는 이제 오랜 내전의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앞서서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는데요. 악티움 해전에서는 그의 친구이자 휘하 장군인 아그리파가 큰 활약을 보였습니다.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클레오파트라가 지원한 덩치 큰 배들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수는 많았지만 그 안에 선원 수가 모자란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수는 적어도 숙련된 선원들이 탑승한 작은 배들로 이루어져 있었죠. 양측은 팽팽하게 맞섰는데요. 이 때 후방에 있던 클레오파트라가 갑자기 이탈해서 도주하자 싸우기에 정신없었던 안토니우스는 상황을 돌아보고는 자신도 전장에서 빠져나와 클레오파트라를 따라갔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왜 막상막하인 전투에서 철수한건지는 좀 의문입니다. 자신이 아직 후방에 있는 상태에서 호각세라면 자신의 배들이 전투에 합류해서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제압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한편 안토니우스는 이 전투를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다음에 더 유리한 기회를 만들어 옥타비아누스의 대결한다면 그 때는 확실히 자산에게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분명 군사적 자질은 자신이 한 수 위니까요.
하지만 그는 이 전쟁이 정치라는 큰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게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재능을 보일 수 있는 다음 기회란 오지 않았으니까요. 안토니우스 휘하의 병사들은 안그래도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같은 로마군인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와 싸우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데, 그마저도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군대를 버리고 도주하는 걸 보니 더더욱 싸울 의욕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많은 수의 병사들은 그냥 싸우기를 포기하고 탈영하거나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도망친 두 사람을 바로 뒤쫒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리스 지역에 계속 있으면서 안토니우스의 동방 영토에 속해있던 지역 유력자들을 대부분 자신의 편으로 포섭했죠. 더 이상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기를 포기한 안토니우스는 항복 의사를 표시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압박해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도 곧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라 자결했구요. 그녀와 카이사르 사이의 아들이었던 카이사리온 역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목숨을 잃고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문을 닫았습니다.
황제의 통치
로마로 돌아온 옥타비아누스는 우선 원로원의 최고의원인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7년에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죠.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이 칭호에는 직접적으로 왕이나 황제라는 의미는 없지만 최고의원이면서 존엄한 자인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사실상 말만 하지 않았을 뿐 황제나 마찬가지인 셈이에요. 오히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훗날 황제라는 의미가 부여되며 후대의 황제들에게 사용됩니다. 이런 사정이 있다보니 로마의 제정을 동방이나 후대의 제정과 구분하는 의미로 원수정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그의 나이도 오십 줄 정도에 들어서지 않았을까 싶지만 불과 3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생각나더라구요. 엄청난 영토를 서른 초반의 나이에 정복했지만 그러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했죠. 근데 아우구스투스는 젊은 나이에 그런 업적을 세우고도 오래 살았습니다. 그는 75세까지 살면서 긴 시간 로마를 통치했고 그의 불운이 모두 후손에게 간 것인지, 후손들이 대부분 그보다 일찍 죽으면서 다음 제위는 자신의 부인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티베리우스에게 돌아갔습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이제 로마를 재건하는 일이 남겨졌습니다. 독재자들의 통치를 받는 동안 나라의 법과 제도가 유명무실화되었고 내전이 잦다보니 시민들의 생활도 편할 리가 없었죠. 이제 전쟁이 어느 정도 잦아들테니 전쟁에 별 소질이 없는 아우구스투스로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우선 군을 재정비해 규모를 줄이는 대신 복무제도와 급여를 체계화해 효율적인 행정을 도모했습니다. 또 군인들이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군대 기금을 만들어 군 재정을 확충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근위대를 창설해서 상시 로마 시내에 주둔하게 했는데요. 원래 로마 시내에는 군대가 주둔할 수 없었잖아요? 근데 그걸 고쳐서 이제 자신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인 근위대에 한해 로마 시내 주둔을 합법화한 것입니다. 원로원이나 다른 정적들은 자신의 군대를 시내로 들여올 수 없을테니, 근위대를 가진 그를 물리적으로 공격하기란 힘든 일이 되었죠. 또한 그는 속주에도 상비군을 두어서 속주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소요사태나 반란에 대비하고, 국경 부근의 안보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위에 있던 시절의 대부분 동안 광활한 속주를 순방했습니다. 카이사르 당시처럼 정복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대신 평화조약을 맺고 국경을 정비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만 북동쪽 라인 강에서 좀 더 동진해서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 엘베 강을 북쪽 국경으로 삼고 싶었지만 게르만족의 저항으로 실패했습니다. 특히나 기원후 9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벌어진 게르만족 지도자 아르미니우스와의 전투는 로마인들로 하여금 옛날 갈리아인과의 처절했던 전투를 생각나게 했죠. 그나마 결과적으로 갈리아인은 복속시켰지만 게르만족 정복에는 끝내 실패합니다.
로마는 그 뒤로도 종종 게르마니아 정복을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면서 게르마니아를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그 게르만족에 의해 거대한 제국이 무너져버렸죠. 결국 현재의 독일 지역은 일부만이 로마의 영토로 포함되면서 완전히 라틴문화권에 포함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로마의 영토로 편입된 갈리아 지역이었던 프랑스와는 확실히 지금도 문화적인 결이 다른거 같긴 해요.
게르마니아 정복은 실패했지만 이제 로마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에 걸쳐 지중해를 완전히 둘러싼 제국이 되었잖아요? 이제 더 넓은 영토를 얻기 위해 피를 흘리지 않고 그냥 현재 속주에서 생산되는 생산물만으로도 충분히 로마 전체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안정되었습니다. 대신 그는 세수 확보를 위해서는 인구가 좀 더 증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장려하고 자녀 수가 많은 가정에 혜택을 부여하는 한편, 재산이 많은 독신 여성에게는 독신세를 걷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최고통치자가 된 이후로도 40년이 넘게 권좌에 앉았던 아우구스투스는 기원후 14년 자신의 제위를 양자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넘기고 75세를 일기로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실 그는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스스로 로마 황제를 칭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그의 지위를 잇는 것도 좀 특이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근위대가 그의 후계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서약을 하는 것이죠. 일찌감치 장자를 세자로 정해 긴 시간 제왕학을 가르치며 양육하다가 선왕이 죽으면 당연하게 즉위하게 하는 동양식 군주제와는 영 딴판입니다.
근위대의 모든 병사들이 로마 시내에 사열해 아우구스투스의 장례를 치르고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퍼포먼스는 다른 누군가가 아우구스투스의 자리를 차지할 여지를 없애고 그 자체가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인정하는 추인식처럼 되었습니다. 이제 황제가 바뀔 때마다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벌인 내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대신 이 관례는 근위대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화시키는 바람에 당장 다음 제위에서부터 시작해 훗날 제정 말기로 갈수록 근위대에 의해 정사가 좌자우지되는 큰 혼란을 불러오게 됩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
아우구스투스 본인은 상당히 장수했지만 그의 후손들이 연이어 요절하자 그는 이미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해 양자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부인인 리비아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죠.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보다는 그 동생인 드루수스를 더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드루수스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역시 드루수스의 뒤를 이을만한 재목으로 보였구요. 그래서 그는 다음 제위는 드루수스에게, 다다음 제위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넘겨주는 것을 구상했지만, 두 사람 모두 요절하면서 후계문제는 처음부터 꼬입니다.
기원후 14년, 55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티베리우스는 즉위 초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계승하는 동시에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벌어진 반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며 무난한 통치를 했습니다. 아직 제위의 세습이 처음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제정이 제대로 자리잡지 않은 데에다가 세습에 대한 정당성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더더욱 인정받아야 했을테니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잘 한 거 아닐까요?
하지만 본래가 좀 폐쇄적이고 내성적이어서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던 그는 주로 서면을 통해 통치행위를 해오다가 나중에는 그마저 그만두고 근위대장 출신인 루시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에게 정사를 맡긴 채 자신은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그가 국정에 거리를 두고 있는 동안 세야누스는 전횡을 일삼아 국고를 낭비했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졌죠. 은둔생활을 한 것 때문에 사생활과 관련된 이상한 소문도 많았구요. 그 때문에 이미지도 나락으로 가면서 로마 시민들의 인기도 잃었습니다.
세야누스는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하는 비상한 야심을 갖고 황가와 결혼으로 맺어지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그래도 얼마 안남은 남자 황족들을 하나둘씩 제거하는 방법으로 제위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했죠. 하지만 그 전에 세야누스의 속셈을 알아차린 티베리우스는 그를 제거하고 그의 주변세력들 역시 숙청하며 공포정치를 휘둘렀습니다. 그는 거의 노인이 되어서 자신의 친족들에 대한 복수를 하며 정국을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이미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기원후 37년, 다음 제위를 이은 이는 칼리굴라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였습니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드루수스의 손자로, 티베리우스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정한 후계였습니다. 그의 재위기간은 4년에 불과했지만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원로원과 심각한 마찰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데요. 오늘날의 미디어 속에서는 네로와 함께 로마의 대표적인 폭군으로만 묘사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평민층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도시의 환경과 치안을 향상시키는 등의 정책으로 평민들에게는 그럭저럭 괜찮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이들이 대부분 원로원의 입장에 있던 이들이어서 그런 평가를 받았던 건 아닐지...
그러나 그는 결정적으로 원로원의 귀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제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로마 역사와 기원을 같이하는 원로원은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죠. 때문에 황제는 언제나 원로원을 존중하고 스스로는 겸손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속마음이야 다를 수 있겠지만요. 그런데 그는 겉으로도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재위기간 동안 여러 번 신변 위협에 노출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기원후 41년, 결국은 암살되었습니다. 배후에는 당연히 원로원이 있었죠.
사실 황제에 대한 암살 위협은 아우구스투스 당시부터 항상 있어왔던 것이었습니다. 공화정 시대 가장 권위있었던 원로원을 능가하는 권력을 황제 개인이 휘두르고 또 그런 체제를 한 가문이 독점해 이어간다는 것을 그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로서는 그들을 잘 달래야 했던건데... 어쨌든 일단 원로원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으니 폭군을 해치웠다며 공화정으로 체제를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일단 기록에서 가이우스의 업적을 모두 말살하고 그의 초상이 들어간 기념물이나 주화를 모두 없애버리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황실의 금고를 원로원으로 옮기고 남은 황족들의 동태를 추적했죠. 그런데 가이우스와 그의 일가는 암살에 성공했지만 아직 그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앞서서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마지막까지 고려했었던, 충분히 황제로 즉위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었습니다. 원로원은 그 역시 제거하기 위해 그의 행방을 쫒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시민들은 황제가 암살당했다는 것에 분노했고, 원로원 귀족들이 보인 가이우스와 황실에 대한 모욕행위를 접하고서는 암살범들의 배후를 가려내라며 시내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원로원이 예상치 못한 민중의 반응에 당황해 있는 사이, 근위대 내부의 황제파 군인들은 원로원보다 먼저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냈습니다. 근위대는 그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그는 얼떨결에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가이우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삼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가이우스와는 좀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온화하고 사려깊은 성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는 근위대가 충성서약을 하려고 할 때에도 한사코 사양하며 제위에 오르기를 망설였죠. 몸이 약해서 군복무를 하며 군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대신 학식과 교양을 두루 갖추었고 역사학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별안간 가이우스 암살사건으로 뜻하지 않게 황제가 된 거죠.
하지만, 일단 권좌에 오르자 그는 아우구스투스에 버금가는 훌륭한 통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우선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소극적이었던 영토확장 정책을 재개하며 로마의 국경을 확대했습니다. 동쪽으로는 현재의 불가리아 남부에 해당하는 트라키아를 정복하며 흑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대했구요. 남쪽으로는 오늘날 알제리 일부와 모로코 지역인 마우레타니아를 정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원후 43년에는 마침내 영국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 일부를 정복하고 속주를 설치하기에 이릅니다. 본인이 직접 원정을 나간 건 아니어도 이 정도면 정복군주라도 해도 될 거 같아요.
또한 그는 수로나 상하수도, 운하, 항구 등의 공공시설에 대한 대규모 토목공사로 사회기반시설을 정비해 평민들의 생활을 개선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새로 건설한 항구 오스티아는 로마로 드나드는 대부분의 물류를 책임지는 외항이 되었습니다. 인재를 양성해서 에퀴테스 계층을 행정관리로 적극적으로 진출시키며, 관료제의 기반을 다지고 행정력을 강화해 귀족들을 견제했구요. 로마시민권을 마케도니아와 히스파니아 속주 등으로 대폭 확대해 이 지역의 로마화를 앞당기며 로마문화권을 형성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일설에는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가 있었다고도 하는데요. 아마 그 장애 때문에 일찌감치 정상적인 후계자로 낙점되는 데에는 실패한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장애가 매우 큰 결함이 되던 그 시대에 그런 약점을 가진 데다가 한번도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그가 이 정도로 훌륭한 통치를 해내리라는 걸 티베리우스가 알았다면 후계자 문제로 그렇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싶어요.
그런 그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역대 황제들이 하나같이 겪었던 암살 위협과 후계 문제였는데요. 문란한 사생활로 시민들의 많은 비난을 받았던 메살리나 황후는 자신의 정부와 손잡고 시시때때로 그의 목숨을 노렸구요. 두번째로 결혼한 아그리피나 황후 역시 자신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네로를 다음 황제로 세우고자 그를 독살합니다. 결국은 성공한 거죠. 이렇게 클라우디우스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다음 제위는 기원후 54년, 네로에게로 이어졌습니다.
네로의 원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네로라는 이름은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얻은 이름이죠. 사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메살리나 황후에게서 얻은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로 제위가 세습되었다면 네로보다는 브리타니쿠스가 황제로 즉위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런데 두번째 황후인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결국 네로가 즉위하게 된거죠.
쿠데타로 즉위하긴 했지만 그의 초기 통치는 '네로의 5년'이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마치 정관지치 (貞觀之治)나 개원지치 (開元之治) 같은 느낌이에요. 그는 철학자 세네카를 자신의 멘토로 삼아 좋은 정책들을 펼쳤습니다. 특히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예술인들을 후원하고 많은 문화행사를 개최했다고 합니다. 본인 스스로도 연극에 출연하거나 시와 노래를 짓기도 했죠.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서 공공건축물에 대한 개보수도 열심히 했습니다. 훌륭하긴 했지만 다소 노잼이었던 클라우디우스 시대를 거친 로마인들은 활기찬 성격의 젊은 새 황제를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하지만 본래도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기질을 지녔던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거듭하고 결국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게 됩니다. 우선 그는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여하는 주변의 친족들을 차례대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와 첫번째 부인인 옥타비아를 죽인 것은 시민들로 하여금 그를 패륜아로 낙인찍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막나가는 그의 행동을 막을 최후의 억제기였던 세네카 마저 제거한 뒤로는 더욱 거침없는 폭정을 휘둘렀죠.
그런데 네로를 폭군의 대명사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은 따로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럽 최대 도시로 대규모 인구가 밀집한 곳이었는데요. 나무로 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안에 여러 가구가 살다보니 화재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기원후 64년에 벌어진 로마 대화재 역시 그렇게 발생한 대형 재난이었습니다. 화재가 벌어지던 당시 네로는 불타는 도시를 보며 시를 읊고 있었다고 해요. 일각에서는 직접 불을 지를 것을 명령했다고 하기도 하구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네로가 도시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고 사후 수습에도 최선을 다했을 거라는 게 정설입니다.
사태는 그 뒤에 벌어졌습니다. 대중으로부터 대화재의 원인에 대해 추궁받자 네로가 방화 혐의를 기독교인들에게 덮어씌운 거죠. 당시 기독교는 로마에 나타난 신흥종교로 나날이 세력이 불어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교 신앙과는 전혀 맞지 않았고 그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공공연한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네로는 기독교도들이 방화를 일으켰다며 그들을 대거 잡아들여서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했습니다. 그의 잔혹성은 당대에도 큰 비난을 받았지만 이후 기독교의 시대인 중세를 거치면서는 더더욱 악마화되어 결국 그는 폭군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연이은 숙청과 대화재로 네로는 점차 측근도 잃고 인기도 잃었습니다. 원로원은 진작부터 그를 싫어했구요. 로마 시민들과 병사들은 물론, 황제의 사병 집단인 근위대에서도 그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여론이 퍼졌습니다. 결국 이런 분위기를 읽은 속주의 총독들 중 히스파니아 총독 갈바가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고, 원로원은 곧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며 이에 동참했습니다. 네로는 로마를 빠져나와 도주하려고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도주를 포기하고 자결했습니다. 기원후 68년,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받은지 9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네로의 죽음으로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된 이 왕조는 더 이상의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과 그의 아내인 리비아의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이의 후손들이 제위를 이었던 이 왕조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구분합니다. 이 뒤에 즉위하는 갈바 황제부터는 아우구스투스와 더 이상 혈연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죠.
돌이켜보면 아우구스투스 본인은 출중한 능력과 행운으로 왕조가 없던 나라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업적을 이뤘지만, 그 과정에서 제정의 태생적 문제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시종일관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거기에 후계에 관해서 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불운이 겹치면서 처음부터 일이 꼬여버려서 한번도 황제 본인의 의도대로 상속을 하지 못하고 황제가 바뀔 때마다 혼란을 겪어야 했던 것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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