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 항해왕자 엔히크 15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레콩키스타를 끝마쳤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후진적인 사회로 낙오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 때에는 히스파니아라는 속주로 프랑스나 영국에 앞서 선진적인 로마 문명의 혜택을 누렸지만 오랜 기간 동안의 이슬람 지배로 서유럽 문화권에서 배제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은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가 강력한 전통사회로 자리잡고 있었고, 북아프리카 지역 역시 이슬람 세계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새로운 세계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한 탐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단지 종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전까지 모든 선진문물은 동방에서 유래된 것이었는데, 유럽 대륙의 제일 서쪽에 위치한 에스파냐.. 더보기 대학의 등장과 스콜라 철학 수도회의 발전 중세의 교회는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학문, 일상생활을 지배했으며 사법기관이자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조직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유럽 사회는 제국의 출현 없이 각 왕국이 흩어져가는 분권화의 역사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분권화 시대에서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유럽 사회를 통합시킨 유일한 구심점이었습니다. 교회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반목하던 세속 영주들과 달리 자체적으로 강력한 통합성을 유지했습니다. 교회는 교회와 수도원으로 나뉘었습니다. 둘은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의 관계였으며 특히 수도원은 교회의 부패를 개혁하며 종교 스스로의 자정작용을 이끌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의 쇠퇴 이후 11세기 말 새롭게 설립된 시토수도회에서는 청빈과 금욕을 강조하고 창시자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을.. 더보기 중세 말 즈음의 비잔티움 제국, 에스파냐 비잔티움 제국 십자군 원정 이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십자군 왕국들이 생겨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미카엘 8세가 팔레올로구스 왕조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가 됩니다. 이 무렵 비잔티움 제국은 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소아시아 서부, 그리스 반도 정도만 갖고 있었고 서유럽의 다른 왕국들과 비교했을 때 평범한 왕국들과 비슷했습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지중해 무역권을 빼앗겨 재정이 악화되고 내부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습니다. 시리아는 일찌감치 이슬람권의 손에 들어가고 그나마 유지하던 소아시아 지역은 오스만튀르크가 차지했습니다. 오히려 서쪽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비잔티움의 속국이면서도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왕.. 더보기 중세 말 즈음의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러시아 분권화의 길을 선택한 독일 대공위시대를 끝낸 신성로마제국에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들어섰지만 독일에서는 여전히 통일되지 못하고 오히려 영방체제가 굳어졌습니다. 남부의 슈바벤과 바이에른 일대만이 독일 황제의 직속령이고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여전히 영방체제로 느슨하게 묶여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발트 해와 북해에 면한 도시들은 한자동맹을 형성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영방국가의 제후들은 모두 독립된 군주들이며 황제 선출이나 공동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만 함께 모여 논의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수립된 이후에도 제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세습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선제후들이 선출했으며 오히려 독일 역사에서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당시의 세습제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대공위시대 이후.. 더보기 백년 동안의 전쟁 백년전쟁의 발단 노르망디 공 월리엄 1세가 영국 왕이 된 이래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영토 분쟁은 늘 있어왔습니다. 이후 앙주 가문이 영국 문제에 개입하고 플랜태저넷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와 앙주를 정복하자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가 크게 넓어졌던 사건과, 성왕 루이 9세 때 파리 조약으로 가스코뉴가 영국의 영토로 인정된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의 불만을 키웠습니다. 오랜 영토 문제는 결국 전쟁의 형태로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왕권을 크게 강화시킨 필리프 4세 이후 카페 왕조는 샤를 4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직계가 끊어지며 왕위계승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위에 권리가 있었던 인물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한 명은 샤를 4세의.. 더보기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등장과 영국 프랑스의 의회제도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등장 노르만족의 이동으로 인구가 대거 유출된 스칸디나비아는 오랫동안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다가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10세기를 전후해 전래된 크리스트교는 이후 토착 종교들을 압도하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널리 퍼졌지만 봉건제는커녕 영주도 기사도 없었고 따라서 당시 서유럽의 강대국들이 대거 참전한 십자군 원정에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제일 먼저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10세기 후반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덴마크 왕들은 노르만족의 이동 후반에 영국에 진출했고 1016년 잉글랜드의 왕이 된 크누드가 덴마크 왕,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면서 스칸디나비아 제국, 또는 북해 제국이라고도 불리우는 제국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 더보기 프랑스의 중앙집권화와 독일의 지방분권화 프랑스의 성장 봉건제가 제일 먼저 자리잡은 프랑스에서는 각 영주들의 세력이 왕권을 압도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당시에도 다른 유력 가문이 왕위를 잇기도 했고 귀족 가문들이 돌아가면서 왕위를 잇는 일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987년 파리 공작 위그 카페가 왕위 세습을 공표하고 카페 왕조를 열었을 당시부터 11세기까지도 카페 왕조의 세력권은 파리와 오를레앙 일대에 불과했습니다. 프랑스가 마침내 왕국으로서의 본격적으로 확장을 시작한 것은 1108년 루이 6세 때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는 봉신들을 단속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의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을 지지함으로써 영지 내 교회 세력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봉건 영주인 아키텐 공작과 플랑드르 공작을 제압하면서 프랑스 왕국의 본격적인 확장.. 더보기 국민국가의 원형 레콩키스타와 에스파냐의 등장 1차 십자군의 원정소식은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도 전해졌습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이베리아 반도에는 서고트족이 왕국을 건설했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후, 피레네 산맥 이남 지역은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의 공격을 받았고 9세기부터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칼 마르텔이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을 코르도바까지 몰아낸 이후 에스파냐인들은 북쪽 끝 산악지대의 아스투리아스를 시작으로 조금씩 왕국들을 세우며 안정시켰습니다. 이후 아스투리아스는 레온으로 확대되었고 레온에서 카스티야가 분리되었습니다. 샤를마뉴 대제가 설치한 에스파냐 변경주는 10세기부터 나바라 왕국으로 독립했습니다. 나바라 왕국에서 분리된 바스크인들은 아라곤.. 더보기 십자군 원정 2차 원정 1차 원정이 성공하고 성지에 새로운 카톨릭 왕국이 건설되자 많은 유럽인들이 이주하기 위해 성지로 모여들었습니다. 왕국을 수립한 군주들도 역시 새 왕국에 정착할 인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성지로 향하는 여정에는 이슬람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주 행렬은 종종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리아 태수 이마드 앗딘 장기는 흩어진 이슬람 세력을 모아 장기 왕조를 수립하여 셀주크 투르크의 토후국이 되고 시리아와 에데사를 탈환했습니다. 이 소식이 서유럽 군주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2차 원정군을 조직했습니다. 2차 원정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독일 황제 콘라트 3세가 주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차 원정 때와는 달리 이슬람군 역시 전투에 대비한 상태였고 2차 원.. 더보기 교황권의 확대와 십자군 전쟁 왕권과 교황권 장원 내의 교회는 분명 로마 교황청에 소속된 종교 조직이었지만 영주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주는 교회에 막대한 토지를 기증하고 각종 혜택을 부여했고 교회는 방대한 토지를 지닌 지주가 되었기 때문에 이 둘은 일종의 공생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중세 초 피정복민들을 종교적으로 통합해 사회를 안정시켜야 했던 당시에는 교회가 세속 군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중세 사회가 안정된 이후로 영주들의 교회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었습니다. 영주들은 친인척을 사제로 임명하여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세력 하에 두려고 했고 교회는 세속적 특권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종교적으로는 타락했습니다.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한 수도원 운동은 교회가 토지를 비롯한 경제적.. 더보기 중세의 초가을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의 발전 로마 시대부터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마무리되고, 그 이후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들을 휩쓸었던 노르만족의 이동도 어느 정도는 잦아들고나니 이제 역사는 11세기로 접어들었네요. 이 두 차례의 민족 대이동은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의 남하였습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서구 문명의 변두리 또는 경계 쯤으로 인식되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시작되어 유럽 내륙과 지중해 지역으로까지 영향을 미친 이 현상은 분명 기존의 유럽 세계를 확대 재편성한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를 헝성하고, 문명사적으로는 로마-게르만 문명, 즉 유럽의 중세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중세 문명의 상징은 크게 크리스트교와 봉건제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이 중 크리스트교 부분을 먼저 봐볼까요? 크리.. 더보기 정복왕 윌리엄 노르만족과 노르망디 공국 샤를마뉴 대제의 거대한 나라가 셋으로 쪼개지던 9세기 초. 세 프랑크 왕국은 모두 이민족의 이동으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민족들은 훗날 헝가리가 되는 마자르족과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족의 일파인 노르만족, 그리고 유럽인들은 사라센이라고 불렀던 이슬람 세력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이라는 나라가 본래 옛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게르만족의 한 일파가 세운 나라이니 이들은 아마도 이민족이 자신들의 거대한 나라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걱정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 중 노르만족은 특히나 자신들과 고향이 같은 형제 민족?이기도 하잖아요. 북쪽에서 내려와 유럽 각지를 휩쓸고 다니던 바이킹족들에 대해 프랑크 왕국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어쩌다가는 가.. 더보기 러시아 헝가리 영국의 탄생 앵글로색슨족의 나라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 대륙을 마주보고 있는 오늘날의 영국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도 훨씬 오래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최대한 간략하게 앞의 이야기들을 먼저 훑어보는 게 좋겠네요. 지금은 영국과 아일랜드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곳은 브리튼 제도라고 부릅니다. 그냥 대충 보면 오른쪽에는 잉글랜드가 있는 큰 섬, 왼쪽에는 아일랜드가 있는 조금 작은 섬, 두개의 섬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사이에는 맨 섬이라는 섬도 있고, 북쪽으로 가면 큰 섬의 해안선이 복잡해지면서 그곳에도 작은 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도라고 부르죠.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전까지만 해도 이 두 섬은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약 1만년 전이라고.. 더보기 동크랑크 왕국에서 독일로 서고트 왕국의 몰락 유럽 대륙에서 프랑크 왕국이 세워진 이래로 샤를마뉴 대제가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하기까의 5 ~ 9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서고트 왕국에는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466년에 즉위한 에우리크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한 서고트 왕국은 수도인 톨로사, 오늘날의 툴루즈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옛 서로마의 아퀴타니아 지역을 차지하고 남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프랑크 왕국이 아직 자리를 잡기 전의 서유럽 세계의 최강자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484년까지 전성기를 누린 서고트 왕국은 에우리크 왕의 사망과 동시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우리크 왕 사후에 즉위한 그의 아들, 알라리크 2세는 이베리아 반도 내에 거주하던 옛 로마인들과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 서고트족 간.. 더보기 카롤링거 르네상스 샤를마뉴 대제 샤를마뉴 대제. 사실 샤를마뉴라는 이름은 위대란 샤를이라는, 별명이 합해진 프랑스식 이름입니다. 그러니 굳이 대제를 붙이지 않아도 위대하다는 의미는 포함되어 있는거죠. 근데 또 서유럽의 공통 조상님 같은 그의 이름을 굳이 프랑스식으로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만합니다. 그래서 대략 훑어보면... 라틴어식 이름으로 부른다면 카롤루스, 독일어식으로는 카를, 영어식으로는 찰스가 됩니다. 다만 샤를마뉴라는 이름을 가장 흔하게 본 거 같아서 여기에서도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샤를마뉴 대에 들어서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급격히 확장되었습니다. 서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와 오늘날 프랑스 최서단의 브르타뉴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서양에 면하게 되었고 동쪽으로는 보헤미아 지방까지 .. 더보기 프랑크 왕국의 수립 메로빙거 왕조의 탄생 조금 큰 그림으로 돌아가보면...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동한 문명의 중심은 로마가 멸망하면서 이제 두 축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무려 천년이 더 지나 15세기까지 수명을 이어간 동로마 제국, 다른 한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남하해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들이 세운 국가들이었죠. 게르만족에 속한 여러 민족들은 옛 서로마 지역을 차지하며 각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는데요. 그 중에서도 서고트 왕국과 동고트 왕국,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성장이 돋보였습니다. 특히 프랑크 왕국은 유럽의 한가운데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며 서로마를 계승하는 새로운 패권국으로 성장하죠. 프랑크 왕국을 세운 사람들은 게르만족 중에서도 프랑크족, 프랑크족 중에서도 살리족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이었.. 더보기 아바스 왕조와 이슬람 문화의 발전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야지드 2세가 통치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끝내고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를 연 칼리파는 히샴입니다. 야지드 2세가 병사하자 그의 이복 동생인 히샴이 즉위한 건데요. 사실 전성기라고 하기는 좀 그런 게, 이미 우마이야 왕조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히샴은 단지 그걸 약간 늦추는 정도였을 뿐 왕조를 부활시키는 못했죠. 그는 학문과 예술을 장려해 많은 저서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이를 학교에서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영토 확장에도 관심이 많아 동서로 정복 사업을 전개했지만 하지만 왈리드 1세 정도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서 확보한 영역을 알 안달루스라고 불렀는데요. 그는 이 알 안달루스에 파견된 코르도.. 더보기 이슬람교의 탄생 오리엔트의 부활 226년, 로마의 숙적이었던 파르티아를 멸망시키며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보다 더욱 거세게 로마를 압박하며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했습니다. 이들은 이란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 동부, 남부 해안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며 번영했지만 651년, 돌풍을 일으키며 아라비아 반도 전 지역을 휩쓴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해버리고 말죠. 이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그토록 강력했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한순간 중동 지역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곳은 아라비아 반도의 서해안 중간 쯤에 있는 메카라는 도시였습니다. 찬란한 고대문명이 꽃을 피웠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남쪽으로 꽤 떨어진 곳으로, 당시까지는 원시 종교에 가까운 다신교 신앙과 정치적.. 더보기 게르만족의 이동 게르만족은 누구일까? 게르만족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로마 주변에 흩어져 살던 여러 민족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원래는 로마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북쪽 국경 일부인 라인강 너머에 살던 일부 민족을 부르는 말이었는데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보다 더 먼 북쪽에 사는 다른 민족들까지 모두 뭉뚱그려서 일컫는 말로 점차 바뀌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딱히 어느 특정 민족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거죠. 그들은 대체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부터 천천히 남하해 동유럽의 초원과 흑해 근처 꽤 넓은 지역에 걸쳐서 주로 목축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일부는 농사를 지어 곡물과 순무, 양배추 같은 것들을 재배하기도 했다는데 그래도 목축의 비중이 훨씬 컸습니다. 원래 목축을 하는 민족들은 가축이 먹을 풀을 찾아 초원지대를 이동하.. 더보기 로마의 멸망 사두정치 사두정치, 테트라키아 체제로 제국을 분할통치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60대에 이르러 특별한 계기 없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으로 가버리자 권력승계가 복잡해졌습니다. 은퇴 직전까지도 강력한 전제군주로 군림하던 그는 서방 정제인 막시미아누스도 함께 은퇴시켰는데요. 그렇게 두 명의 동, 서방 정제가 물러난 자리는 각 정제의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방 부제는 갈레리우스의 친척 막시미누스 다이아, 서방 부제는 갈레리우스의 부장인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차지했죠. 사두정치를 주도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라졌으니 이제 이 체제를 유지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누구나 예상하듯, 이제 네 명의 황제들은 곧 자신들끼리 우열을 가리기 위한 각축전을 시작했죠. 우선 두 명의 부.. 더보기 몰락하는 로마 로마가 남긴 것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린 로마는 이제 전성기를 지났을 뿐, 그 뒤로도 수명은 아직 한참 더 남았습니다. 서로마를 기준으로 해도 300년에 가까운 역사가 남았구요. 비잔티움 제국으로도 불리우는 동로마의 역사까지 포함한다면 1200년이 넘는 시간을 더 존속했으니 이제 시작인 셈이죠. 그래서 로마가 남긴 것을 여기에서 얘기하는게 너무 이른 감이 좀 있긴 하지만, 로마가 후세에 남긴 유산들 중 이미 이때부터 존재했던 것들에 대해서 한 번 돌아볼까 합니다. 로마의 경제는 공화정 초기부터 정복사업에서 얻어진 포로들을 노예로 이용해 노동력을 충당해왔습니다. 하지만, 제정 시대에 들어서는 정복사업이 예전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주기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키면서 노예의 수가 감소했습니다. .. 더보기 오현제 시대의 황제들 네 황제의 해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어딘가 엉성한 제정은 5대 째인 네로 대에 이르러 마침내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가 계속된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군대 지휘권을 가진 속주의 총독들이 하나둘씩 '네로 타도'의 깃발 아래 모인 것이죠. 그 중 네로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한 것은 네로보다 40살이 더 많은 노장 갈바였습니다. 그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있던 시절 갈리아 총독 빈덱스, 그리고 오늘날의 포르투갈 지역에 해당하는 루스타니아의 총독 오토와 함께 네로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고 68년,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와 혈연적으로 무관한 첫번째 황제였죠. 이제 제위에 오르는 데에 더 이상 혈통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갈바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다시 공화정 말기의 군사독재.. 더보기 제정 시대의 로마 두번째 삼두정치 카이사르의 사후 빠르게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의 가장 강력한 측근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습니다. 그는 공화파들에 대한 복수로 정국이 또 혼란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속주로 파견하는 한편, 카이사르를 따르던 군인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며 사태를 적절히 수습해 민심을 얻었습니다. 물론 내심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을 차지하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요. 하지만 막상 카이사르의 유서가 공개되고 나니 그 내용이 그의 예상과 너무 달랐습니다. 카이사르가 지명한 후계자는 그의 질녀의 아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였습니다.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었죠. 잘 알려지지 않은, 내세울만한 것도 없는 청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나마 카이사르에게 .. 더보기 군사독재와 카이사르의 등장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동서 양쪽으로 팽창한 로마가 아직 가지 않은 길이 있었습니다. 갈리아인들과 게르만족이 차지하고 있는 북쪽이었죠. 이들의 문명 수준은 로마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아직 부족 연맹체를 형성한 정도였지만 언제라도 로마를 공격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 역시 로마로서는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제 게르만족이 새롭게 등장했네요. 게르만족은 보통 오늘날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독일, 그리고 체코 일부 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통칭합니다. 게르만이라는 말 자체는 아직까지도 어디에서 온 말인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기원전 8세기 쯤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에서 발생해서 꾸준히 남하해 갈리아인들 일부를 몰아내고 로.. 더보기 우리들의 바다 이제 슬슬 서양사가 여러 가지로 갈라지기 시작하네요. 메소포타미아 일부에서 오리엔트 전역으로 그리고 그리스 지역으로 점차 서쪽을 향해 중심이 이동해온 서양사는 이제 로마가 등장하면서 한 개의 갈래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여러 개로 쪼개졌던 디아도코이들의 왕국들은 로마의 세력이 강력해진 뒤에도 한동안 역사를 이어갔으니까요. 애초에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뒤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확장하게 된 것도 동쪽에는 아직 헬레니즘 왕국들이 건재했기 때문이었죠. 그래도 아직은 여러 개의 갈래로 갈라진 역사를 번갈아가며 살펴볼만하니 로마 이외의 지역도 가끔은 돌아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물론 더 뒤로 가면 이 갈래는 또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더욱 복잡하게 뒤얽힐 예정이지만, .. 더보기 로마와 카르타고 큼직큼직한 나라들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프리카 북부를 보면 북쪽 해안선의 거의 중간 쯤에 조금 작은 나라가 눈에 띄는데요. 튀니지입니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과 매우 가깝구요. 그래서인지 구글에서 사진을 검색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오아시스가 있는 사막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분명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인데 말이에요.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에서 좀 더 동쪽 해안가로 가면 소도시 카르타고가 있습니다. 지금은 인구 2만5천의 작은 도시가 되었지만 이 카르타고는 한 때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다시피한 강력한 고대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가 이제 막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바다로 눈을 돌렸을 때 이미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일대와 시칠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큰 섬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더보기 공화정 시대의 로마 라티움 지역의 작은 촌락에서 시작한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동안, 나라 안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변 부족들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자 이 전쟁에 동원되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꾸준히 지위를 향상시켜온 것이었죠. 그렇게 로마는 외형적으로만 커졌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으로도 점차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치체제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결과는 공화정의 수립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평민권의 확대과정 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후 왕이 가졌던 권력은 누가 갖게 되었을까요? 왕을 쫒아낸 귀족들이 나눠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로마가 건국되던 시기 때부터 권력을 갖고 있었던 유력 가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귀족들은 파트리키 (Patricii) 라고도 불리웁니다. 이들은.. 더보기 로마! 몇 년 전 로마를 짧게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을 거쳐 로마에서 일정을 보내고 이제 또 다른 도시로 출발하려고 숙소를 나오는데, 바로 그 전날까지만 해도 관광객들로 가득찼던 도시 곳곳에 펜스가 쳐져 있고 사람들의 통행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저처럼 어리둥절해하는 관광객들이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들에게 물어보니 그 날이 마침 4월 21일, 로마의 건국기념일이라고 하더라구요. 기념 퍼레이드를 위해서 미리 인파를 통제하는 거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오래 전 일의 날짜가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전해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썩 믿어지지 않지만... 우리나라도 단군 할아버지께서 처음 나라를 세우신 때를 기원전 2333년 10월 3일로 계산해서 개천절을 기념하니까 아마 나라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것을 .. 더보기 알렉산드로스 대왕 '마케도니아 (Macedonia)'라는 나라 이름 들어보셨나요? 발칸 반도 중간 쯤에 있는 내륙국가입니다. 옛날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있다가 유고 연방이 붕괴되면서 독립국이 되었죠. 축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가끔 경기를 보셨을 수도 있겠구요. 한국 사람들은 많이 찾지 않지만 풍광이 뛰어나고 물가가 싼 '오흐리드 (Ohrid)'라는 휴양지를 들어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몇 년 전에는 그리스와 나라이름을 두고 벌인 다툼이 뉴스를 탄 적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의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와는 큰 관련이 없는 슬라브계 국가입니다. 두 나라의 위치가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지금의 마케도니아 일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의 마케도니아의 북부지방에 해당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더보기 그리스 철학의 탄생 민주주의는 그리스의 유산일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셸리의 작품 의 한 구절이라는데, 영국인인 그가 왜 자기네들이 다 그리스인이라고 하는 걸까요? 바로 그 뒤의 문장에 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의 법률, 문학, 종교, 예술은 모두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과 일본, 베트남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리스는 분명 중국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보다 더 크게 서양사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서양인들이 그리스를 서구문명의 요람으로 여기는 가장 큰 요인을 꼽으라면, 아마도 민주주의와 철학, 이 두 가지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중간에 중세라는 .. 더보기 이전 1 2 다음